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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제7호 태풍 ‘카눈(Khanun)’이 어제(19일) 낮 12시30분을 기해 소멸했다. ‘카눈’은 누적강수량 339mm(제주도 한라산 진달래밭), 최대순간풍속 37.4m/s(광주 무등봉)를 기록했다. 이번 태풍으로 일부 지역의 항공 운항이 중단되고, 일시 정전이 발생하는 등 피해가 잇따랐으나 대규모 피해는 없었다.

 

그런데 태국의 열대과일 이름인 ‘카눈’이 어쩌다 태풍이름이 된 것일까. 결론부터 말하면 태풍 이름에 특별한 사유가 있는 것은 아니다. 태풍위원회 14개 회원국이 10개씩 제출한 고유어 총 140개가 순차적으로 사용된다. 28개씩 5조로 나누어 1조에서 5조까지 차례로 지정하는 식이다. ‘카눈’도 그 순서에 따라 이번 태풍의 이름이 됐다.

 

한해 발생하는 태풍은 약 30여개. 따라서 140개 이름을 모두 사용하려면 4~5년이 소요된다. 전체 이름을 한 번씩 다 사용하고 나면 1번 이름부터 다시 사용한다.

 

 

태풍은 한 번 발생하면 1주일 이상 지속되는 경우가 많다. 때문에 동시에 같은 지역에 하나 이상의 태풍이 존재할 수 있다. 이런 경우 발표되는 태풍 예보를 혼동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 태풍에 이름을 붙이게 된 것이다.

 

태풍에 처음 이름을 붙인 것은 호주의 기상예보관들이었다. 당시 호주 예보관들은 태풍에 자신이 싫어하는 정치가의 이름을 붙여 불렀다. 예를 들어, 싫어하는 정치가의 이름이 ‘앤더슨’일 경우 “현재 앤더슨은 태평양 해상에서 헤매고 있는 중입니다” “앤더슨이 엄청난 재난 일으킬 가능성이 있습니다”라며 예보를 하곤 했다.

 

공식적으로 태풍에 이름을 붙인 것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인 1953년부터다. 미국 공군과 해군의 예보관들은 자신의 아내나 애인의 이름을 태풍이름으로 사용했다. 여성처럼 온순하고 조용해지라는 의미가 담겨 있었다고 한다. 이 전통에 따라 태풍의 이름에는 여성의 이름만을 써 왔다. 그러나 사람에게 피해를 주는 자연현상에 여성의 이름만을 쓰는 것은 성차별이라는 논란이 일면서 1978년부터는 남성과 여성의 이름을 번갈아가며 사용해 왔다.

 

우리나라에 영향을 미치는 북서태평양 지역 태풍의 경우 1999년까지는 공식적 이름이 없었다. 세계기상기구(WMO)의 규정에 따라 일본 도쿄에 위치한 ‘지역특별기상센터(RSMC)’에서 공식 번호만 부여했다. 1999년에 발생한 제7호 태풍의 경우 ‘9907’로 번호를 부여하는 식이었다. 관습적으로 ‘미국합동태풍경보센터(JTWC)’가 정한 미국식 이름을 사용하기도 했다.

 

지금처럼 태풍위원회 회원국들의 고유어로 태풍 이름을 짓기 시작한 것은 2000년부터다. 1997년 홍콩에서 열린 제30차 태풍위원회 총회에서 미국식 태풍이름 대신 회원국의 고유 언어로 된 태풍이름을 2000년부터 사용하기로 결의한 것. 각국 국민들의 태풍에 대한 관심을 높임으로써 태풍 경계를 강화하기 위해서다.

 

 

태풍위원회는 아시아·태평양 지역의 태풍 피해 최소화를 위해 1968년 설립된 기구다. 회원국은 한국, 북한, 미국, 중국, 일본, 캄보디아, 홍콩, 태국, 필리핀, 베트남, 라오스, 마카오, 말레이시아, 미크로네시아 등 14개국이다.

 

2000년부터 이 국가들이 각 10개씩 고유어 이름을 제출해 태풍이름으로 사용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중 우리말 이름만 유독 20개나 된다. 남한과 북한 양국에서 각각 한글 이름을 제출하기 때문이다. ‘매미’ ‘기러기’ ‘장미’ 등 친근한 태풍이름이 자주 등장하는 이유다.

 

태풍이름에는 그 나라의 특성이 나타나기도 한다. 한국과 북한은 주로 동식물·자연현상의 이름을 쓰고 있다. 우리나라가 제출한 너구리·개미·미리내(‘은하수’의 순 우리말), 북한이 제출한 소나무·무지개·메아리 등이 그 예다. 우리나라는 태풍이 온화하기 지나가길 바라는 마음을 담아 주로 작고 순한 동·식물의 이름을 사용하고 있다.

 

일본의 태풍이름 중에는 별자리 이름이 많다. ‘덴빈’은 천칭자리, ‘야기’는 염소자리, ‘우사기’는 토끼자리를 의미한다. 중국의 경우 신(神)의 이름이 많다. ‘펑선’(바람의 신), ‘하이선’(바다의 신), ‘뎬무’(번개를 관장하는 여신) 등 절반이 신의 이름이다. 미국은 오히려 폭우·폭풍구름·폭풍 등 직접적으로 태풍을 의미하는 이름을 사용하고 있다. 마트모(Matmo)·아타우(Etau)·에어리(Aere)가 그 예다. 사람 이름도 4개를 사용하고 있는데, 그중 3개가 남자 이름이다.

 

 

태풍위원회는 막대한 인명·재산 피해를 낳은 태풍이름을 영구 제명하기도 한다. 피해를 입은 국가는 매년 11월께 열리는 태풍위원회 총회에서 해당 태풍이름의 퇴출을 요청할 수 있다. 태풍으로 엄청난 피해를 본 사람들이 다시 똑같은 이름의 태풍을 맞이하는 것은 유쾌하지 않은 일이기 때문이다.

 

우리나라는 2002년 역대 최대 피해를 남긴 ‘루사(Rusa)’ 이름의 삭제를 요청한 바 있다. 우리나라에 5조원이 넘는 재산 피해와 246명의 인명 피해를 입힌 ‘루사’는 이후 ‘누리’(‘세상’을 이르는 순 우리말)로 변경됐다.

 

 

우리나라 태풍이름 중에는 2004년 ‘수달’이 미크로네시아의 요청으로, 2005년 ‘나비’가 일본의 요청으로 퇴출됐다. 2005년 발생한 ‘나비(Nabi)’는 중심 최대풍속이 49m/s에 달하는 대형 태풍이었다. 당시 우리나라에 2명의 인명피해와 1385억 원의 재산피해를 냈다. 이어 일본으로 방향을 튼 나비는 규슈(九州) 지방을 관통하면서 1300mm가 넘는 엄청난 비를 뿌렸고, 20여명의 인명피해와 막대한 재산피해를 남겼다. 결국 같은 해 11월 열린 38차 태풍위원회 총회에서 ‘나비’ 명칭의 퇴출이 결정됐다. 우리나라 기상청은 이듬해 대국민 공모를 통해 나비를 독수리로 변경했다.

 

북한이 제출한 ‘봉선화’와 ‘매미’는 각각 중국(2002년)과 한국(2003년)에 막대한 피해를 내 ‘노을’과 ‘무지개’로 교체된 뒤 퇴출됐다. 이처럼 막대한 피해를 내 영구 제명된 태풍이름은 2000년 이후 총 24개에 이른다.

 

 

 

고서령 기자 koseor@onkweath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