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장인 K씨(31)는 아침에 일어나면 가장 먼저 냉장고로 향한다. 시원한 물을 한 컵 마신다. 리모컨으로 TV를 켠다. 아침 뉴스를 시청하며 전기밥솥에 따뜻하게 보온된 밥으로 식사를 한다. 밤새 충전된 휴대폰을 들고 집을 나선다. 매일 출퇴근은 전철을 이용한다. 이동 중엔 MP3로 노래를 듣는다. 하루 종일 컴퓨터로 회사 업무를 본다. 퇴근 후엔 헬스클럽에서 러닝머신을 이용해 운동을 한다. 집에 돌아오면 캄캄한 방에 불을 켠다. 아침에 눈을 뜰 때부터 잠들기 전까지 줄기차게 전기를 이용하는 셈. ‘전기 없인 하루도 못 사는 세상’에서 산다는 얘기다.
전기는 1W를 만드는 데도 많은 노력과 자원이 투입되는 소중한 에너지다. 그런데 우리가 일반 가정에서 내는 전기료의 10% 상당은 사용하지도 않은 전기에 대한 요금이라는 사실, 당신은 알고 있는지.
집안 ‘대기전력’으로 한 해 4100억원 이상 낭비
지금 이 순간에도 사용하지 않은 10% 상당의 집 전기가 계속해서 ‘공중분해’되고 있다. 원인은 대기전력. 전자기기의 전원이 꺼진 상태에서 리모컨 신호 대기, 모니터 표시, 타이머 등 기기의 본래 기능과 무관하게 소모되는 전력을 말한다. 아무도 모르게 전기를 먹어치운다는 뜻으로 ‘전기 도둑’, ‘전기 흡혈귀(Power Vampire)’라고도 불린다. 대기전력은 플러그를 뽑으면 차단되지만, 대부분 ‘귀찮다’는 이유로 꺼리는 것이 현실이다.
때문에 지금도 전국적으로 약 3억대의 전자기기가 쉬지 않고 평균 2.01W(2011년 기준)의 대기전력을 소비하고 있다. 이렇게 소비되는 전력이 가구당 한 해 대략 209kWh에 이른다. 금액으로 환산하면 약 한달치 전기요금에 해당하는 2만4000원에 해당한다. 국가 전체로는 3470GWh/년, 한 해 무려 4164억원이 대기전력으로 낭비되고 있다. 그 돈으로 적금이라도 부었으면 좋았으련만. 뭔가 억울하다.
에너지관리공단 자료에 따르면 대기전력 소모량이 가장 큰 가정용 전자기기(2011년 가구보유분 기준)는 셋톱박스다. 셋톱박스는 디지털 텔레비전 신호를 일반 텔레비전에서 볼 수 있도록 전환하는 장치다. 전원이 꺼져도 플러그만 꼽혀 있으면 12.3W의 전력이 지속적으로 소모된다. 오디오(5.6W), DVD플레이어(3.7W), 전기밥솥(3.5W), 컴퓨터·프린터(각각 2.6W) 등이 그 뒤를 잇는다. 특히 오디오, DVD플레이어 등 리모컨 신호를 대기하는 전자기기들은 대기전력 소모량이 큰 편이다. <그래픽 참조>
스위치 달린 멀티탭, 책상 위에 설치하면 OK
어떻게 하면 이 에너지 도둑을 잡을 수 있을까. 여기서는 좀 솔직해질 필요가 있겠다. 가장 좋은 방법은 전자기기를 사용하지 않을 때 플러그를 뽑아 놓는 것이다. 하지만 그게 그렇게 쉬웠다면 애초부터 대기전력이 발생할 일도 없었을 게다. 역시나 ‘귀찮다’는 것이 문제. 매번 책상 밑, 또는 구석진 곳으로 머리를 숙이고 들어가 플러그를 뽑고, 꼽는 것은 여간 번거로운 일이 아니다.
크게 힘 들이지 않고 대기전력을 차단하는 방법이 있다. 콘센트마다 각각 스위치가 달린 멀티탭을 이용하는 것. 사용하지 않는 전자기기의 플러그가 꼽힌 콘센트의 스위치만 끄면 된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책상·선반 위 등 ‘손이 닿기 쉬운 곳’에 멀티탭을 설치하는 것이다. 아무리 간편해도 책상 밑이나 구석진 곳에 설치할 경우 또다시 ‘귀차니즘(귀찮은 일을 몹시 싫어하는 태도나 사고방식)’이 발동할 수 있기 때문이다. 전선만 잘 정리하면 미관상 나쁘지도 않다.
최근엔 전기를 사용하지 않을 때 일정시간이 지나면 자동으로 전력이 차단되는 ‘자동절전제어장치’도 속속 출시되고 있다. 컴퓨터 본체의 전원이 꺼지면 컴퓨터의 부속 기기인 모니터, 프린터, 스피커 등도 자동으로 절전되도록 개발된 멀티탭 제품도 있다. 콘센트에 시간을 설정해 지정된 시간이 되면 자동으로 절전되는 콘센트 제품도 개발됐다. 지난해 12월에는 국내 한 중소기업이 전기코드를 뽑지 않아도 대기전력을 완전 차단하는 PC를 개발해 이목을 집중시키기도 했다.
▲ 콘센트마다 개별 스위치가 있는 멀티탭. 슈퍼마켓이나 마트에 가면 쉽게 구입 가능하다.
▲ 대기전력을 100% 차단하는 컴퓨터 (사진=모노테크원 제공)
에너지소비효율등급이 높은 제품을 구매하는 것은 기본이다. 에너지관리공단 관계자는 “1등급 제품을 사용하면 3등급 제품을 사용하는 것보다 평균 20~30%의 전력 감소 효과가 있다”고 설명했다. 특히 전력 소모량이 많은 세탁기, 냉장고의 경우 에너지소비효율등급이 높은 제품을 구매하는 것이 좋다.
정부, 2015년까지 대기전력 0.5W 이하 목표
정부는 지난 2005년 7월부터 대기전력 1W 이하 달성을 목표로 여러 정책을 펼쳐왔다. 이에 따라 2008년부터 오프모드 또는 수동대기모드에서 대기전력이 1W를 초과하는 일부 전자기기에 대해 ‘대기전력 경고라벨’을 부착하도록 했다. 반대로 대기전력 저감기준을 만족하는 제품에는 ‘에너지절약’ 마크를 표시해 소비자들이 제품을 구매할 때 대기전력 절약에 대해 고려할 수 있도록 했다.
▲ 에너지절약마크 표시제품은 일반제품보다 에너지가 30~50% 절약된다.
지식경제부와 에너지관리공단은 2015년까지 전자기기의 대기전력을 0.5W 이하(오프모드 기준)로 낮출 계획이다. 이 정책이 성공적으로 진행될 경우 우리나라 연간 대기전력 총량은 2740GWh까지 낮아질 전망이다. 그러나 대기전력이 ‘0’이 되지 않는 한 소중한 전기에너지를 지키기 위한 사용자 개개인의 노력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점, 잊어서는 안 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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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서령 기자 
